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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 친일 애국가 교체?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가 친일파라는 주장이 최근 다기 나오고 있습니다. 일부는 애국가 교체까지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작곡가 안익태(1906~65)가 친일 논란으로 다시 소환 됐습니다.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의 친일 행적 논란은 2006년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이전까지 주로 위인전에 등장하던 안익태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탄생 100주년을 맞아 활발히 이뤄지면서 구체적 행적이 드러나면서입니다.

 

두번째 논란은 2019년 정치학자 이해영이『안익태 케이스』를 출간하면서 일었습니다. 이해영은 안익태의 친일, 친나치 행적을 세세히 밝혔습니다. 일본 외교관과 베를린과 한 집에 머물며 스파이 역할을 했을 거란 심증까지 더했습니다. 
 
친일 행적이 드러날 때마다 애국가도 출렁였습니다. 애국가의 적정성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자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급기야 이달 15일 75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김원웅 광복회장이 “대한민국은 친일파의 나라, 친일파를 위한 나라가 되었다”며 안익태를 예로 들기에 이르렀습니다.
 
안익태가 일본 지휘자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특히 김 회장이 밝힌 ‘만주국 건국 10주년 축하 연주 영상’은 이미 2006년 밝혀져 논란이 됐던 것입니다. 당시 독일 유학생이었던 송병욱이 음악잡지 ‘객석’를 통해 이 영상을 공개했고 안익태 친일 행적을 대표하는 자료로 자리잡았습니다.

 

 

이 영상에서 안익태는 일본인이 쓴 가사에 오케스트라와 합창을 위한 ‘만주국 환상곡’을 작곡해 이를 직접 지휘했습니다. 이 곡엔 안익태 애국심의 상징이던 ‘한국 환상곡’의 선율까지 인용돼 있어 당시 100주년의 분위기를 급랭시켰습니다. 이 영상이 14년 만에 새롭게 논란이 된 것입니다.

 


안익태를 수십년 연구한 음악학자들은 이미 밝혀진 자료를 가지고 10여년동안 정치적 공방이 벌어지는 점을 안타깝게 본다고 합니다. 또 "이제 논의의 수준을 기계적 이분법과 흑백논리 이상으로 높일 때가 됐다"고 지적합니다.
 
안익태의 친일 행적만큼이나 확실한 것은 모순적이게도, 그의 충직했던 애국심이었습니다. 안익태 기념재단은 “1919년 3ㆍ1 운동 때 수감자 구출운동에 가담했다가 평양 숭실중학교에서 제적당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또 애국가(1935년), ‘한국 환상곡’(1930년대, 정확히는 미상)을 썼던 30년대 중반까지도 미주 한인 신문 ‘신한민보’에 식민지 조국에 대한 슬픔을 토로했습니다.  

 

안익태는 애국자이자 동시에 친일파 일 수 있습니다.

 

김원웅 광복회장이 지난 15일 광복절 75주년 기념식에서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를 ‘민족반역자’라 부르며 국가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해 정치권의 친일·반일 논란이 다시 불이 붙었습니다.

김 회장은 기념사에서 “민족반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국가로 정한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라며 안익태를 친일 인사로 규정했습니다. 김 회장은 17일 라디오 인터뷰에서도 “독일 정부에 요청해 최근 받은 자료에 의하면 안익태는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연주회를 베를린에서 나치 고위층과 함께 했는데, 지휘를 하더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1942년 9월 안익태와 베를린교향악단의 ‘만주국 환상곡’ 초연을 뜻한다. 김 회장은 그러면서 안익태의 친일, 친나치, 표절을 주장했습니다.

안익태는 친일인명사전에 올랐으나 친나치 행적이나 표절 의혹은 학계에서 정리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지난해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출간한 ‘안익태의 극일 스토리’는 “안익태는 정치인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삶과 예술을 정치적인 행위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잘못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반면 ‘안익태 케이스’의 저자 이해영 한신대 교수는 음악적 가치가 아닌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기호로서 애국가가 적절하고 합당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안익태가 민족반역자 친일파인지 애국자인지 논란은 계속 일어날것으로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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