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6.10 민주항쟁이란? 

2020년 6월 10일 6.10민주항쟁 33주년입니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고 이한열 열사 33주년 추모식에 참석 고인의 유족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6.10 민주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29일까지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독재 민주화 운동입니다. ‘6・10 항쟁’, ‘6월 항쟁’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영화 1987을 보시면 이해가 좀 빠를겁니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완전 궤변입니다.

 

6.10민주항쟁이란?

1979년 12·12사태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일어난 범국민적 민주화운동입니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고 그해 5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이 사건이 은폐·축소된 것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시위가 확산되는 가운데 6월 9일 연세대생이었던 이한열 군이 시위 과정의 부상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면서, 이전까지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민주화 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33년 전인 1987년 6월 9일, 군부 독재 타도를 외치던 이한열 열사가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그의 죽음은 6월 민주 항쟁의 기폭제가 됐습니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받던 중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검찰은 이 사실을 숨기려했지만, 부검의의 증언과 언론보도 등으로 인해 물고문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국민들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습니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4.13 호헌조치’를 통해 직선제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특별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학생들과 종교계를 중심으로 호헌 반대 운동이 퍼져나갔습니다. 5월 20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경찰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축소·조작했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국민들은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범국민대회’를 구성하고 6월 10일 규탄 대회를 갖기로 했습니다.

6월 9일, 연세대학교에서 국민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개최되던 중 시위를 하던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 군이 정문 앞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졌습니다. 그는 병원으로 실려가 27일간 사경을 헤매다 7월 5일 향년 2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6.10 민주항쟁에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지역에서 약 24만명의 시민들이 참석했습니다. 당초 하루로 예정된 국민대회는 시위대가 명동성당에서 농성투쟁을 벌이면서 15일까지 이어졌다. 6월 18일에는 시위대가 ‘최루탄 추방의 날’을 선포해 전국 16개 도시에서 150만명이 시위에 참여했으며, 6월 26일에는 전국 34개 도시와 4개 군읍에서 180만명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결국 당시 집권여당인 민정당의 대표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과 대통령 선거법 개정, 김대중 사면·복권과 정당의 자유로운 활동 등을 보장하는 8개 안을 약속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게 됐습니다.

 

6월 민주항쟁 의의

6월민주화운동은 민주세력과 시민의 역량에 의해 권위주의적 정부의 권력유지 시도가 저지되었다는 점, 전체 과정을 통해 시민사회의 정치적 의식이 성숙했다는 점, 노동운동을 비롯한 각종 대중운동의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점 등의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이후 민주화를 주도했던 세력이 정권을 수립하지 못했기에 평가 절하 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민주화운동은 한국사회의 근대적 발전 과정 가운데 진정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한 획기적 전기를 마련한 계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반응형

+ Recent posts